군나르 베르게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위원장(2000.12.10)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의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평화상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이 수십 년 간 전제주의의 통치하에 있을 때, 수차례의 생명에 대한 위협과 장기간의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은 점차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의 민주국가 대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씨는 확고한 민주 정부의 수립과 한국에서의 내부적 화합 증진을 추구해 왔다.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김대통령은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동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버마(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햇볕정책’을 통해 김대통령은 50년 이상 지속된 남북한 간의 전쟁과 적대관계의 해소에 노력해왔다. 그의 북한 방문은 남북한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과정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이제 한반도에 냉전이 종식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또한 인근 국가들, 특히 일본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왔다. 노벨 위원회는 한반도의 화해 진전과 통일을 위한 북한 및 여타 국가 지도자들의 기여를 인정하고자 한다.
The Norwegian Nobel Committee has decided to award the Nobel Peace Prize for 2000 to Kim Dae Jung for his work for democracy and human rights in South Korea and in East Asia in general, and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with North Korea in particular.
In the course of South Korea's decades of authoritarian rule, despite repeated threats on his life and long periods in exile, Kim Dae Jung gradually emerged as his country's leading spokesman for democracy. His election in 1997 as the republic's president marked South Korea's definitive entry among the world's democracies. As president, Kim Dae Jung has sought to consolidate democratic government and to promote internal reconciliation within South Korea. With great moral strength, Kim Dae Jung has stood out in East Asia as a leading defender of universal human rights against attempts to limit the relevance of those rights in Asia. His commitment in favour of democracy in Burma and against repression in East Timor has been considerable.
Through his "sunshine policy", Kim Dae Jung has attempted to overcome more than fifty years of war and hostility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His visit to North Korea gave impetus to a process which has reduced tens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There may now be hope that the cold war will also come to an end in Korea. Kim Dae Jung has worked for South Korea's reconciliation with other neighbouring countries, especially Japan.
The Norwegian Nobel Committee wishes to express its recognition of the contributions made by North Korea's and other countries' leaders to advance reconciliation and possible reunific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Oslo, 13 October 2000
군나르 베르게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위원장(2000.12.10)
왕림하신 폐하 그리고 신사숙녀 여러분!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는 2000년 노벨평화상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김대통령은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기울인 평생의 노력,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이 상을 수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한 화해의 절차를 위해 상을 수여하는 것이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김대통령의 인권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이 최근 남북한관계의 진전과는 별도로 수상후보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과의 화해를 위한 강력한 김대통령의 다짐 및 이행과, 특히 지난 1년 동안 이룩한 업적이 이번 수상에 새롭고 중요한 몫을 더한 것도 역시 명백합니다.
국제 평화노력의 역전가능성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노벨상위원회는 "해보려고 애쓰는 시도가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평화상은 지금까지 이룩해온 조처에 대해 수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벨평화상의 역사에서 자주 보아온 것처럼 올해도 역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머나먼 길에 더욱 진척이 있기를 격려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는 넓은 범위에서 용기의 문제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고착화된 50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아마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전선 너머로 협조의 손길을 뻗으려는 의지를 지녀왔습니다. 그의 의지는 개인적, 정치적 용기이며 유감스럽게도 다른 분쟁지역에서는 너무 자주 결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삶에서 적용되는 똑같은 이치가 평화를 위한 노력에도 적용됩니다. 가장 높은 산을 등정하려할 때의 이치가 그것입니다. 첫걸음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등정길의 마무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동반자들에게 의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르웨이 남서부의 항구도시 스타번게르의 작가 군나르 롤드크밤은 그가 쓴 시 "마지막 한 방울"에서 다음과 같이 명료하면서도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현재 김대중씨는 민주한국의 대통령입니다. 김대통령의 집권까지의 노정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는 권위주의 독재체제와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을 했습니다. 그가 어디에서 그러한 힘을 찾을 수 있었는지 물어볼만 합니다. 그 자신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독재체제에 항거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추진해 갈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스스로를 강도가 침입한 집의 주인같이 느꼈습니다. 내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안위는 접어두고 맨손으로라도 침입자와 싸워야 했습니다."
1950년대 김대중씨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을 때, 경찰은 집권체제가 내세운 후보이외의 다른 후보에 대한 지지를 방해하고 나섰습니다. 1961년에 가서야 그는 피선되었지만 그의 성공은 단명했습니다. 3일 후에 일어난 군사쿠테타로 국회는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단념치 않았습니다. 1963년 거의 10년 세월의 정치적 투쟁 끝에 그는 드디어 야당의원으로 국회의석을 차지했습니다. 꼭 덧붙여 말씀드려야 할 것은 여당이 그를 매수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매수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씨는 상당한 투표조작에도 불구하고 유효투표의 46%를 획득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는 군사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여러 해를 처음에는 감옥에서 나중에는 가택연금과 일본과 미국에서의 망명생활로 보냈습니다. 그는 또 납치와 암살기도를 겪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시련을 어떻게든 견디어내면서 그는 체제에 대한 뚜렷한 반대입장을 지속해 나갔습니다.
노르웨이 국회대표단의 일원으로 나는 1979년 한국을 방문했으며, 그 방문을 통해 김대중씨 지지자들과 접촉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스칸디나비아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로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가혹한 교도소환경 속에서도 김대중씨는 삶을 바쳐서 해야 할 일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불굴의 낙관적 태도를 가지고 그는 교도소 안에서 발견한 "즐거움"에 대하여 썼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모든 종류의 서적 통독이 그것입니다. 신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 그리고 문학서적들입니다. 가족과의 짧은 면회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갖가지 방해시도가 있었음에도, 그와 가장 가까웠던 인사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정원에서 꽃을 돌보는 일도 허용되었습니다.
김대중씨의 얘기는 몇 몇 다른 평화상수상자, 특히 넬슨 만델라와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경험과 공통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을 받지는 않았지만 수상할 자격이 있었던 마하트마 간디의 그것과 함께 말입니다. 김대중씨가 간직한 불굴의 정신은 국외자들에게 거의 초인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수상은 보다 진지한 면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6,7차례 투옥되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은 나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겁이 많다. 그간의 경험에서 볼 때, 투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철창에 갇힐 때마다 너무 무섭고 초조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김대중씨는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 더 출마했습니다. 군사정권이 그의 길을 막고 있지 않았다면 지역으로 첨예하게 갈라진 한국에서 그의 출신지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투쟁에 지친 그는 드디어 1992년 선거 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1997년, 김대중씨는 새로운 기회를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정적들이 서로 분열된 가운데 군사정권의 주요 적수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정말 드디어 한국이 세계 민주주의국가 대열에 오르게 되었음을 확실히 입증한 것입니다.
새 대통령은 보복할 생각을 틀림없이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의 경우처럼 용서와 화해가 김대중씨의 주요 정강정책들이 되어 그를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김대중씨는 용서할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용서했습니다. 대신, 민주적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혁명 후에도 구질서의 일면은 남게 마련입니다. 민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은 법제도와 보안법 문제에 관한 한 개혁해야 할 부문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하면 한국의 교도소에는 정치범으로 장기형을 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노조 결성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근 반세기동안 민주주의를 앞장 서 대변해온 김대통령이 민주화 과정을 마무리해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현재 아시아에서는 인권에 관한 중요한 토론이 진행 중입니다. 혹자는 인권이 서방에서 나온 것으로 서구의 정치적, 문화적 지배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합니다. 김대중씨는 이러한 시각을 부정하면서 보편적인 인권과 다른 아시아적인 특별한 인권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금년도 평화상시상의 근거로 노벨상 위원회는 똑같은 생각을 갖고, 동아시아의 인권상황 진전에 김대중씨가 맡은 중요한 역할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1996년의 평화상 수상자인 호세 라모스 오르타씨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씨는 동티모르의 대의를 위해 온힘을 기울였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는데 사용되었던 한국군이 이제는 동티모르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가토록 결정하는데 엄청난 상징적 힘이 발휘되었습니다. 김대중씨는 또한 1991년도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가 미얀마의 독재에 항거, 영웅적인 투쟁을 벌이는 것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은 과거 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그녀와 함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미얀마 정권은 또 다시 아웅산 수지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씨는 한국의 전면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과 적극적인 협조관계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씨는 남한이 북한을 합병하거나 흡수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시간이 걸리고 아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목표는 통일인 것입니다.
“햇볕”이라는 단어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해와 달이 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한데서 따온 것입니다. “햇볕정책”은 바람을 막지 않더라도 남북한이 공동의 이익을 서로 나누고 이를 강화함으로써 최소한의 추위를 누그러뜨리자는 것입니다.
김대중씨가 현재 진행 중인 해빙과 화해의 주동자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마 그의 역할은 동서독간의 관계정상화에 아주 중요한 동방정책(ostpolitik) 추진으로 노벨 평화상을 탄 빌리 브란트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만으로는 통독이 불가능했지만 1989-90년의 독일통일에 필수불가결 했습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통독의 정치적인 면은 매력적으로 보이겠지만 경제적 비용이 독일보다 훨씬 더 들것이란 점에서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지난 6월 김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대화는 보다 느슨한 선언과 경쾌한 수사(修辭)로 발전되었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장면은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접촉이 아무리 제한되고 통제된다 하더라도 기쁨의 눈물은 판문점의 모든 방문자들이 절실히 느끼는 추위와 증오, 그리고 실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북한주민들은 오랫동안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그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거나 엄청난 정치적 탄압에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북한 지도자들은 남북한 화해를 향해 첫발을 내딛게 한 역할을 인정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냉전의 빙하시대는 끝났습니다. 세계는 햇볕정책이 한반도의 마지막 냉전 잔재를 녹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과정은 시작되었으며 오늘 상을 받는 김대중씨 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분은 없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첫 번째 떨어지는 물방울이 가장 용감하노라.”
국왕 폐하, 왕세자와 공주 등 왕실가족 여러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위원 여러분, 그리고 내외 귀빈과 신사 숙녀 여러분.
노르웨이는 인권과 평화의 성지입니다. 노벨평화상은 세계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위해 헌신하도록 격려하는 숭고한 메시지입니다. 저에게 오늘 내려주신 영예에 대해서 다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수 많은 동지들과 국민들을 생각할 때 오늘의 영광은 제가 차지할 것이 아니라 그 분들에게 바쳐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국민의 민주화와 남북 화해를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세계의 모든 나라와 벗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노벨평화상을 저에게 주신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난 6월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과 그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남북 화해•협력 과정에 대한 평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노벨위원회가 긍정적으로 평가해 준 최근의 남북관계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 6월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북한에 갈 때 여러가지 걱정이 많았지만 오직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일념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회담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남북은 반세기 동안 분단된 가운데 3년에 걸친 전쟁을 치렀으며 휴전선의 철책을 사이에 놓고 불신과 증오로 50년을 살아 왔습니다.
이러한 남북관계를 평화와 협력의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저는 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북에 의한 적화통일을 용납하지 않는다.둘째,남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도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셋째, 남북은 오로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협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얼마가 걸리더라도 서로 안심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북한은 처음에는 우리 햇볕정책을 북한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여기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관되고 성의있는 자세와 노르웨이를 비롯한 전세계 모든 나라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는 마침내 북한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북 정상회담 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은 예상했던 대로 참으로 힘든 협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민족의 안전과 화해․협력을 염원하는 입장에서 결국 상당한 수준의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조국의 통일을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이룩하자,또 통일을 서두르지 말고 우선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 협력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둘째,종래 남북 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통일방안에 대해서도 상당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북한은 우리가 주장한 통일의 전 단계인 ‘1민족 2체제 2독립정부’의 ‘남북연합제’에 대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형태로 접근해 왔습니다. 분단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통일에의 제도적 접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셋째, 한반도에 미군이 계속 주둔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안전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데에도 합의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50년 동안 남한에서의 미군 철수를 최대 쟁점으로 주장했습니다. 저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강조했습니다. “미․일․중․러의 4강에 둘러싸여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특수한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는 우리로서는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필수불가결하다. 미군은 현재 뿐 아니라 통일 후에도 필요하다. 유럽을 보라. 당초 ‘나토’의 창설 과 미군의 주둔은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침략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공산권이 멸망한 지금도 ‘나토’와 미군이 있지 않느냐.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그 존재가 계속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뜻밖에도 종래의 주장을 접고 적극적인 찬성의 뜻을 나타냈는데, 이는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참으로 뜻 깊은 결단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이산가족이 만나는 데 합의했으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원만하게 실천에 옮겨지고 있습니다. 경제협력에 대해서도 합의를 했습니다. 이미 투자보장, 이중과세방지 등 4개의 협정을 체결하는 합의서에 서명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북한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 비료 30만t과 식량 50만t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문화 교류에 대해서도 합의해 스포츠, 문화예술, 관광 교류 등이 점차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남북간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 국방장관회담이 열려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남북 간의 분단된 철도와 도로를 다시 연결하기 위해 양쪽 군이 협력하는 데에도 합의했습니다.
한편 저는 남북관계의 개선만으로는 한반도에서 평화와 협력을 완벽 하게 성공시킬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나아가 일본과 다른 서방국가들과도 관계를 개선할 것을 적극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 ‘클린턴’대통령, ‘모리’총리 등 미․일 양국의 정상에게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권고했습니다.
또한 저는 지난 10월에 서울에서 열렸던 제3차 ASEM 정상회의에서 유럽의 우방국가들에게도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북․미 관계와 유럽․북한 관계는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한반도의 평화에 결정적인 영향과 진전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제가 민주화를 위해서 수십 년 동안 투쟁할 때 언제나 부딪힌 반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으며 그러한 뿌리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아시아에는 오히려 서구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인권사상이 있었고 ,민주주의와 상통한 사상의 뿌리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하늘로 삼는 다. ’‘사람이 즉 하늘이다. ’‘사람 섬기는 것을 하늘 섬기듯 하라.’ 이런 것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근 3,000년 전부터 정치의 가장 근본요체로 주장되어 온 원리였습니다. 또한 2,5000년 전에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내 자신의 인권이 제일 중요하다’ 는 교리가 강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권사상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상통되는 사상과 제도도 많이 있었습니다. 공자의 후계자인 맹자는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다.하늘 이 백성에게 선정을 펴도록 그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다.그런데 만일 임금이 선정을 하지 않고 백성을 억압한다면 백성은 하늘을 대신해 들고일어나 임금을 쫓아낼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존 로크가 그의 사회계약론에서 설파한 국민주권사상보다 2,000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이미 기원 전에 봉건제도가 타파되고 군현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공무원을 시험에 의해서 뽑는 제도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해서 임금을 포함한 고관들의 권력 남용을 감시하는 강력한 사정제도도 존재했습니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에 대한 풍부한 사상과 제도의 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아시아에서는 대의적 민주제도의 기구는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서구사회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인류의 역사에 크게 기여한 훌륭한 업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서구의 민주제도는 민주적 뿌리가 있는 아시아에서 이를 채택할 때 아시아에서도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일본․필리핀․인도네시아․태국․인도․방글라데시․네팔․스리랑카 등 수 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동티모르에서 주민들이 민병대의 혹독한 학살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독립을 지지하는 투표에 참가했습니다. 지금 미얀마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가 고난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미얀마 국민과 민심의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미얀마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회복되고 국민에 의한 대의정치가 다시 부활하는 날이 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절대적인 가치인 동시에 경제 발전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민주주의가 없는 곳에 올바른 시장경제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또한 시장경제가 없으면 경쟁력 있는 경제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민주주의적 기반이 없는 국가경제는 사상누각일 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98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과 함께 ‘생산적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2년 반 동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생산적 복지의 병행 실천이라는 국정철학 아래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적극 보장하고 있습니다. 금융․기업․공공․노동 부문의 4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습니다. 복지의 중점을 저소득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인력 개발에 둠으로써 이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개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을 조속히 마무리함으로써 전통산업과 정보산업, 생물산업을 삼위일체로 발전시켜 세계 일류경제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지식정보화시대로서 부(富)가 급속히 성장하는 시대입니다. 동시에 정보화시대는 부의 편차가 심화되어 빈부격차가 급격히 확대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빈부격차도 커져 갑니다. 이것은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심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21세기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인권의 탄압과 무력의 사용을 적극 반대해야 합니다. 아울러 정보화에서 오는 새로운 현상인 소외계층과 개발도상국의 정보격차를 해소함으로 써 인권과 평화를 저해하는 장애요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존경하는 국왕 폐하,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 개인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릴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에 다섯 번에 걸쳐서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 6년의 감옥살이를 했고,40년을 연금과 망명과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이러한 시련을 이겨내는 데에는 우리 국민과 세계의 민주인사들의 성원의 힘이 컸다는 것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동시에 제 개인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첫째,저는 하느님이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 속에 살아 오고 있으며, 저는 이를 실제로 체험했습니다.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저는 한국 군사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이 긴급뉴스에 경악했었습니다. 한국의 정보기관원들은 저를 일본 해안에 정박해 있던 그들의 공작선으로 끌고 가서 전신을 결박하고 눈과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바다에 던져 수장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때 저의 머리 속에 예수님이 선명하게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붙잡고 살려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를 구원하는 비행기가 와서 저는 죽음의 찰나에서 구출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저는 역사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위협을 이겨 왔습니다.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서 사형 언도를 받고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그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저는 죽음의 공포에 떨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데는 ‘정의필승’이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저의 확신이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모든 나라 모든 시대에 있어서, 국민과 세상을 위해 정의롭게 살고 헌신한 사람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반드시 승자가 된다는 것을 저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승자들은 비록 당대에는 성공을 하더라도 후세 역사의 준엄한 심판 속에서 부끄러운 패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국왕 폐하,그리고 귀빈 여러분.
노벨상은 영광인 동시에 무한한 책임의 시작입니다. 저는 역사상의 위대한 승자들이 가르치고 알프레도 노벨 경(卿)이 우리에게 바라는 대로 나머지 인생을 바쳐 한국과 세계의 인권과 평화, 그리고 우리 민족의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여러분과 세계 모든 민주인사들의 성원과 편달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2000. 12. 10.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20년 전 세계는 희망에 휩싸였다. 평화, 자유, 민주주의와 통합을 위한 전세계에서 일어난 운동들의 영향을 받아 세계 국가들은 노력하여 냉전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역사적 변화로 열린 많은 기회들은 현재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는 핵무기 및 재래식 무기 경쟁, 국제법의 존중 약화, 또한 빈곤과 환경오염에 대처하지 못하는 세계 정부들의 무능력함에 우려를 표명한다. 폭력은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유엔, 요한 바오로 2세, 달라이 라마와 다른 지도자들이 옹호하는 평화의 문화를 구축할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과거로부터 계속된 도전과제 뿐 아니라 새로운 과제들도 등장했다. 이들은,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문명간, 종교간, 문화간 충돌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테러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공동의 윤리적 가치들(인권 존중, 기본적인 자유 등)을 강화시키고 민주주의 원칙을 따라야만 테러가 종식될 수 있다. 우리는 폭력으로 폭력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테러의 근본 원인인 빈곤, 무지 그리고 정의의 부재를 해결해야 한다.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폭력도 매일 일어나고 있다. 어린이들은 가장 소중하면서도,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보물이다. 아이들의 보호, 안전, 건강은 가장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전세계 어린이들은 평화를 위해 교육 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들의 안전, 복지를 지켜야 하며, 특히 전시에 이러한 권리들이 짓밟히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라크 전쟁은 위험한 불안정의 온상이며 테러의 근원이 되고 있다. 핵물질의 도난 사고에 대한 믿을 만한 보고들은 절대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수만명의 사람들의 희생을 애도하지만, 연합군이 세웠던 목표들은 하나도 달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안보, 빈곤, 환경위기의 과제들은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한 다자적 노력으로만 해결 가능하다. 모든 국가들은 조약 의무들을 성실히 시행해야 하고 유엔의 중요한 역할을 재확인해야 하며, 평화 유지를 위한 유엔 안보리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북핵문제의 신속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지지한다. 또한 북한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검증가능하게 포기해야 하고, 미국은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경제제재를 해제해야 한다. 6자회담과 미-북 양자대화를 통해 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우리는 최근 이란의 핵프로그램 문제에 대해 이란과 영국, 프랑, 독일이 논의한 것을 환영한다. 또한 미국이 이런 대화에 참여해 IAEA 틀 안에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국가들의 군사비 감소를 촉구한다. 또한 인권과 국제법을 위협하는 무기 거래 등을 통제할 수 있는 조약이 속히 체결되기를 바란다.
노벨상 수상자로서, 우리는 국제사회가 빈곤과 지속가능한 발전과 관련된 과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제들의 해결을 위해서는, 굳은 정치적 의지가 필요하다.
유엔 새천년회의에서 국가들이 한 약속들, 즉 개발원조, 공정한 무역, 시장 접근, 개도국을 위한 부채 탕감 등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빈곤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널리 퍼진 위험한 재앙이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은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고, 국가들은 혼란과 절망에 빠져 있다. 이는 극단주의와 테러를 불러일으키는 토대를 마련한다. 인류의 미래와 안정은 위협받고 있다.
과학자들은, 식수, 에너지, 기후변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질서가 무너지고 더 많은 군사분쟁이 일어나고, 결과적으로 인류가 기반을 두고 있는 체제 자체가 위협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토 의정서와 지구 헌장 (Earth Charter)의 지지를 재확인하고, Green Cross International의 이니셔티브에서 제시한, 권리를 바탕으로 한 식수 접근을 지지하고 국가들의 식수와 관련된 조약 협상 촉구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우리는 인류가 새로운 전례 없는 기회들을 잡고 직면한 위협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더 개선된 세계 지배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엔과 유엔 조직들의 개혁, 강화를 지지한다.
당면 과제로 우리는 다음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 중동 위기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는 테러 문제를 해결하고 문명간의 위험한 충돌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지역 내 모든 국가들의 안전하고 실현 가능한 주권이 보장되고, 중동 국가들이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국민성을 유지하면서 모든 국제사회 프로세스에 통합된다면 중동문제는 해결이 가능하다.
-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의 유지, 강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이중 잣대를 반대하고, 핵보유국들의 핵무기 폐기 책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전면적 핵실험금지조약(Comprehensive Test Ban Treaty)의 발효와, 그전까지 핵실험 모라토리엄의 지속을 촉구한다. 또한 되돌릴 수 없고 검증가능한 핵무기 감축을 더 신속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로운 사용가능한 핵무기의 개발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핵무기를 전쟁 중 사용가능한 무기, 또 선제공격의 위협을 주는 정당한 도구로 인정하는 독트린들의 폐기를 촉구한다.
- 우리는 유엔 사무총장이 2005년에 고위급 회담을 열도록 지원하고, 새천년 개발 계획의 이행을 촉구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는 큰 중요성을 가진 이 새천년 개발 계획들의 이행을 위해 국민적 여론이 형성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우리는 오늘날 세계가 맞은 도전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권리를 지닌 시민사회와 대중과 함께 상호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폭력을 거부하고 윤리적, 문화적, 정치적 다양성을 존중하며 정의, 동정심, 인류 통합을 강조하는 진정한 세계화를 이룩할 수 있는 길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개인과 기관들은 이러한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며, 모든 정부와 모든 사람들의 동참을 촉구한다.
아웅산 수지 여사 관련 선언문
로마에서 제5차 노벨평화상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은 우리의 좋은 동료인 아웅산 수지 여사가 올해도 이 회의에서 참석하지 못한 것에 큰 우려를 표명한다. 비폭력과 민주주의의 산 증인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이는 전세계에 손실이다.
우리는 아웅산 수지 여사와 지지자들의 인권, 정치적 권리 등을 전면적으로 즉각 회복시키기를 미얀마 정부에 촉구한다. 정의가 이를 요구하고 있다.
미하일 고르바쵸프, 김대중, 바웬사, 롯블라트, 호세 라모스 호르타, 베티 윌리엄스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전대통령, ‘2006 노벨평화상수상자 광주정상회의’ 개회식 기조연설(2006.6.16,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존경하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
국사 다망하신 중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자리에 왕림해 주신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존경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대통령을 위시한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수상단체 대표 여러분!
여러분을 충심으로 환영합니다. 또한 이 자리를 같이 하신 내외귀빈 여러분도 환영해 마지않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회의가 원만히 개최되도록 도와주신 박광태 광주시장과 연세대 정창영 총장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광주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성지입니다. 1980년 5월 17일 저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의해서 구속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 광주시민들은 거리로 나와서 ‘계엄령 해제하라’, ‘군사 쿠데타 주모자 전두환 물러나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했던 것입니다. 그때 신군부는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무자비한 총탄세례를 퍼부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150명 이상이 사망하고 3천명 이상이 부상당했습니다. 한편 10일 동안 계속된 광주 민주항쟁은 참으로 위대한 정신을 간직한 거사였습니다.
첫째, 광주 민주화운동은 군부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운동이었습니다.
둘째, 광주 민주화운동은 전시민적인 궐기 속에서도 질서와 평화를 지킨 운동이었습니다.
셋째, 광주 민주화운동은 시민군이 열흘 동안이나 시를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군인이나 경찰에게 한 사람도 위해를 가하지 않는 비폭력의 운동이었습니다.
넷째, 광주 민주화운동은 시가 시민군의 장악 속에 있을 때 모든 금융기관과 상점들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영업을 할 수 있는 높은 질서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섯째, 광주 민주화운동은 시민군들이 시를 장악하고 있던 열흘 동안 신군부와 계속 대화를 시도하는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매우 건설적인 자세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광주 5.18 민주화정신은 전국민과 온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한국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숭고한 정신적 가치에 대해서 모두가 감탄과 경의를 표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 나라에 반석과 같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져왔고, 그런 토대 위에 경제발전과 남북간의 화해 협력의 시대를 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신군부에 의해서 광주폭동의 배후지휘자로 몰려서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신군부는 저를 죽이거나 아니면 자기들에게 협력하는 괴뢰로 만들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저에게 죽지 않으려면 자기들에게 협력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물론 죽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기 위해서 당신들에게 협력하면 나는 일시적으로는 살 수 있겠지만 역사와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나는 일시적으로는 죽겠지만 역사와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 것이다. 나는 역사와 국민을 배신할 수 없다.” 저는 이렇게 말하면서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 후 국민과 세계의 비등하는 항의에 의해서 저는 사형집행을 면할 수가 있었습니다.
광주의거는 신군부의 폭력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주의거 정신을 간직한 전국민의 끈질기게 계속된 민주화 투쟁에 의해서 불과 7년만에 민주주의는 다시 이 땅에서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지금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 남북간의 화해 협력으로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발전도상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아시아의 여러 언론들은 한국의 경제발전도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혹독한 군부의 탄압 아래서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끝내 민주주의를 회복한 한국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할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평화와 화해 협력의 위대한 광주의거의 정신이 깃든 이곳에서 ‘2006 노벨평화상수상자 광주정상회의’를 갖게 된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이 회의는 광주시민은 물론 우리 국민과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광주의거의 정신과 결부되어 많은 영감을 주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광주의거는 이 땅의 민주화를 가져왔고 민주화는 통일에의 국민적 열망을 고조시켰습니다. 과거에는 통일만 이야기해도 용공으로 의심받고 탄압받았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이런 족쇄는 풀렸습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민족의 통일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저의 2000년 6월 13일 북한 방문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큰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남북의 양정상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해결하자는데 합의했고, 통일은 점진적이고 착실한 방법으로 실천하자고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교류 협력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에도 합의했습니다. 분단 반세기만에 대립과 적대관계를 넘어서 민족 상호간의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양정상의 합의는 여러가지 구체적인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남북간의 긴장이 크게 완화되고 전쟁의 가능성은 매우 감소되었습니다.
둘째, 반세기 동안 생사의 소식도 모르던 수백만의 이산가족이 이제 서로 만나거나 소식을 듣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직접 만난 이산가족이 1만3천명이나 됩니다. 정상회담 이전에는 50년 동안 불과 200명만이 상봉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북한의 명산 금강산을 관광한 남한 사람이 130만명에 달하고 지금도 계속 관광을 하고 있습니다.
넷째, 남쪽의 수많은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고 있고 특히 휴전선 가까이에 있는 개성공단에서는 이미 6천명의 북한 근로자가 남한기업에서 일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 숫자는 70만 명까지 늘어날 것입니다.
다섯째, 남북간의 철도연결공사가 완료되어 머지않아 개통될 것이며, 이 철로는 앞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갈 것입니다. 남북의 철도연결은 관계 각국의 엄청난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가져올 것입니다. 물론 남한도, 북한도 큰 혜택을 얻을 것입니다.
여섯째, 남북간에는 학술, 문화, 체육 등의 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왕래한 사람의 수가 10만명이 넘었습니다. 이것은 남북의 화해 협력을 증진시키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큰 동력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우리는 1,300년 동안 통일을 유지한 민족입니다. 외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분단된 지 60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한 것도 아니고 승낙한 바도 아닙니다. 어찌해서 이러한 부당한 분단을 우리 민족의 영원한 운명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민족이 반드시 힘을 모아 평화적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할 것을 확신해 마지않습니다.
우리는 독일식의 흡수통일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힘도 부족하고 부작용도 많습니다. 또한 우리는 베트남식의 무력통일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또다시 무력대결이 일어난다면 7천만 민족이 공멸하는 위기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같이 살면서 교류 협력하다, 서로가 안심할 수 있을 때 평화적으로 통일할 것입니다. 그 통일은 남북한 공동승리의, 윈윈의 통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염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만족할만한 진전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경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색의 당면 이유는 북한 핵문제입니다.
저는 북한 핵문제는 해결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미국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경제적 제재를 해제해 주어야 합니다. 서로 불신이 크기 때문에 동시에 실천해야 합니다. 북한과 미국은 작년 중국 베이징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의 결과를 존중하면서 그러한 방향으로 핵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서야 합니다. 물론 우리 한국도 힘을 다해서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6자회담은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시아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가장 알맞은 조직입니다. 6자회담의 참여국가인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 일청전쟁, 일러전쟁이 있었고, 일본의 한국 병탐에는 미국도 외교적으로 가담했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이 4대국이 남북한과 긴밀하게 협의해서 한반도 평화보장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35년 전인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4대국 한반도 평화보장론’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미국 예일 대학의 폴 케네디 교수는 최근 한국에 대해서 “한국은 네 마리의 큰 코끼리 다리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다. 한국이 사는 길은 그 사이를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 가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은 이제 과거와 같은 약소국가가 아닙니다. 상당한 경제적 능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수천만명의 믿음직한 국민도 있습니다. 남북이 힘을 합쳐서 4대국과 협상하고 협력해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동시에 동북아시아와 세계 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지도자 여러분!
인간의 마음에는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는 축복이 오거나 재앙이 오거나 할 것입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의 결과를 가져오려면 감상적인 담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빈곤과 질병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나 신앙, 철학이 다른 문명간의 대화와 협력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과 테러행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모든 갈등은 약자에 대한 배려 속에서 대화로 풀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은 특별한 영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서 헌신할 의무가 있습니다. ‘광주정상회의’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큰 기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가 되어야겠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을 이 곳에 모시게 된 것을 큰 영광과 자랑으로 생각하면서 머무시는 동안 내내 즐거운 체류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June 16, 2006 The Kim Dae-jung Convention Center, Gwangju)
Keynote Speech By Dr. Kim Dae-jung, Former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t the Opening Ceremony
of the "2006 Gwangju Summit of Nobel Peace Laureates"
His Excellency, President and Mrs. Roh Moo-hyun!
It is great honor to have you here despite your hectic schedules, and I deeply appreciate your gracious presence today with us.
His Excellency, former President Mikhail Gorbachev and Nobel Peace laureates!
I wholeheartedly welcome all of you. I also welcome all the distinguished guests from home and abroad who are here with us today.
I would also like to express my gratitude to Mayor Park Gwang-tae of Gwangju Metropolitan city and President Jung Chang-young of Yonsei University for organizing this event.
Ladies and gentlemen!
Gwangju city is the mecca of democracy in my country. On May 17, 1980, I was arrested by the military dictatorship that raised a military coup. Then the next day, the citizens of Gwangju came out on the streets and started a peaceful demonstration against the military regime calling for the “end of the martial law” and the “ousting of Chun Doo-hwan, the leader of the military coup” and the “release of Kim Dae-jung”. The military mercilessly fired shots to the innocent citizens who were participating in this peaceful movement, resulting in the sacrifice of countless victims. More than 150 people were killed and more than 3,000 were injured. The Gwangju Uprising that lasted for ten days was a memorable incident in which the great spirit was truly embedded.
First, the Gwangju Democratic Uprising was a movement where innocent citizens sacrificed their lives fighting against military dictatorship and achieving democratization.
Second, the Gwangju Democratic Uprising was an orderly and peaceful uprising even though it was a wide-spread demonstration of people.
Third, the Gwangju Democratic Uprising was a movement of non-violence where not one soldier or police was attacked even when the city was controlled by the citizens for ten whole days.
Fourth, during the Gwangju Democratic Uprising, the people showed impeccable high level of order where all the banks and shops could continue their businesses without any disturbances from the demonstration.
Fifth, the Gwangju Democratic Uprising demonstrated the efforts of the citizens to continuously try to have dialogue with the military dictatorship during the ten days under their rule.
Such great spirit of the Gwangju Democratic Uprising greatly moved the hearts and souls of not only the people of Korea but also the whole world. All expressed their admiration and respect to the yearning and the values of the Korean people for democratization. Such democratic movement in Gwangju enabled democracy to take firm root in Korea, and based on this foundation we have now opened an age of economic development, and reconciliation and cooperation between the two Koreas.
In the past I was accused by the then military regime of being a ringleader in the uprising in Gwangju and was tried by a court-martial and sentenced to death. The military dictators were set to either make me into their cooperating puppet, or kill me. They demanded that I cooperate with them if I wanted live.
I told them, “Of course I do not want to die. But if I cooperate to save my own life, I would live temporarily but die forever in history and in the hearts of the people. However, if I do not cooperate, I would die but live forever in history and in the hearts of the people. I cannot betray history and the people.” Saying such words, I had chosen the path to death. Afterwards, thanks to fierce opposition from the Korean people and all around the world, my death sentence was eventually not carried out.
The Gwangju Uprising was suppressed temporarily by the use of force of the military dictatorship. However thanks to the endless struggle of the Korean people for democratization, democracy has again seen light after just 7 years. Korea is highly respected in the world for its democracy, economic prosperity and inter-Korean reconciliation and cooperation. Korea has become a good example for many developing countries in the process of economic development. The press in many Asian countries recently commented that though economic development in Korea is highly commendable, what is more remarkable is the Korean people themselves who brought democracy through peaceful means even in harsh oppression of the military regime, and that they should be regarded as a good example to follow.
It is truly timely that the "2006 Gwangju Summit of Nobel Peace Laureates" is being held here in Gwangju city, the city where the great spirit of the Gwangju Uprising that include democracy, peace, reconciliation and cooperation are embedded. I believe that our Nobel Peace Laureates’ Summit can be held in connection with the spirit of the Gwangju Democratic Uprising, providing great inspiration to not only the citizens of Gwangju but also all the Korean people and the people of the world.
Distinguished guests!
The Gwangju Democratic Uprising brought democracy to this country, and democracy increased the people’s longing for unification. In the past, just by talking of unification was enough to be accused and oppressed of being pro-communist. However since democracy was established such oppression has stopped. All can talk freely of unification of our peoples. Against this backdrop, I embarked on the Inter-Korean Summit on June 13, 2000.
And the Summit brought huge results. The heads of state of both the South and the North agreed that our destiny must be shaped by ourselves and that unification should be pursued step by step in a gradual manner. We also agreed to actively pursue exchange and cooperation in all areas including politics, economy, society and culture. Though not yet realized, there was also agreement on Chairman Kim Jong-il’s return visit to Seoul. Half a century of division that resulted in hostility and confrontation ended to open a new age of reconciliation and cooperation between the two Korean peoples. Such agreement between the two leaders of the South and North shaped into the following detailed results.
First, tension has been significantly eased on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possibility of war has subsided.
Second, now is the age where hundreds of separated families can meet or hear the news of their loved ones. The number of separated families that have been reunited has reached 13,000. The number stood at a mere 200 for 50 years until the Summit.
Third, the number of South Korean tourists who have visited Mount Kumgang, one of the most beautiful mountains of the Korean Peninsula located in the North, has reached 1.3million and the number is continuously growing.
Fourth, many companies from the South have advanced into the North. Especially in the Kaesong Industrial Complex near the DMZ already 6,000 North Korean workers are working in South Korean companies and this figure will grow to 700,000 in the future as planned.
Fifth, the construction of the railroads linking the South and the North has been completed and the railroads will be opened in the near future, reaching through China, Russia to the whole Eurasian continent. The reconnection of railroads between the South and the North will bring remarkable economic and cultural development for all related countries. The South and the North, of course, will see huge benefits.
Sixth, exchanges in academia, culture and sports between the two Koreas have increased. This will be a driving force in enhancing reconciliation and cooperation between the two Koreas and restoring the affinity between our peoples.
Distinguished guests!
We are a people that had been unified for 1,300 years. Sixty years have passed since the Korean Peninsula was divided against our will by outside forces. This is not what we want, nor is it what we agreed to. How can we just accept such unjust division as the fate of our people? I am confident that the Korean people can hold hands to achieve peaceful unification on the Peninsula in the end through our own will.
We do not want unification through absorption like Germany. We do not have such capability and many side effects may occur. We also do not want unification by force like Vietnam. If another violent confrontation is to occur on this land, the future of the 70 million Korean people could be under threat. We will coexist peacefully and pursue exchange and cooperation peacefully and achieve unification peacefully when both feel reassured. Such unification will be a win-win situation where both the South and the North are winners.
Despite our hopes and efforts, inter-Korean relations have not yet seen truly satisfying results. The biggest reason is the stalled U.S.-North Korean relations. And the most pending issue in this stalemate between the U.S. and North Korea is the North Korean nuclear issue.
I believe that this issue can be resolved. North Korea must completely give up its nuclear weapons program and receive thorough inspection. In return, the United States must guarantee the safety of North Korea and lift economic sanctions. Because there is a lack of trust between the two, both countries must take actions simultaneously. Nor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should both respect the results of the “Joint Statement of the 4th round of the six-party talks” agreed on September 19, 2005 and actively lead the way so that the nuclear issue can be resolved in such direction. Korea should, of course, must provide our utmost support.
The six-party framework is the form most appropriate for bringing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security of the whole of Northeast Asia. The members of the six-party talks, the U.S., Japan, China and Russia have had huge influence over the Korean Peninsula, geopolitically and historically. There were the Sino-Japanese war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nd the Russo-Japanese war at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and even the United States had diplomatic influence in the Japanese invasion of the Peninsula. Therefore, to bring lasting peace on the Peninsula, these four powers should closely cooperate with the two Koreas and have responsibility in guaranteeing peace on the Peninsula. Thirty five years ago when I ran in the 1971 presidential election, I had emphasized that these four powers should guarantee the security on the Peninsula.
Professor Paul Kennedy of Yale University in the U.S. recently said regarding Korea that, “Korea is a country stuck between the legs of four big elephants. There will be no way to survive unless Korea handles itself well among this four neighboring powers.” Korea is no longer a small weak country. Korea has economic and military power and also tens of millions of trustworthy people. I believe that the South and the North can join hands to negotiate and cooperate with the four powers to maintain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at the same time contribute to peace in Northeast Asia and the whole world.
Distinguished leaders!
An angel and a devil live in the hearts of all people. Depending on which side we choose to take, the future that we face can be either blessed or cursed. To bring blessed results to all people around the world, sentimental rhetoric is not enough. Above all, we must actively try to resolve the situation of the people who are suffering from poverty and disease in the world.
Furthermore, dialogue and cooperation should be pursued among civilizations with different religions, faiths and philosophies. We must resolutely oppose resolving issues through war or terrorism. All conflict must be resolved through dialogue, with sympathy for the disadvantaged.
We, the Nobel Peace laureates, are people given special honor. We have the obligation to uphold peace, democracy and justice. I hope that the “2006 Gwangju Summit of Nobel Peace Laureates” can greatly contribute to achieving such goal. We must deliver a message of good tidings to the people of the world.
Once again, I would like to say that it is a great honor to have all of you here, and hope that you have a pleasant time during your stay.
Thank you.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 기조연설 (2008.9.11, 노르웨이 스타방게르)
존경하는 군나르 베르게 <노벨평화상수상자 Follow-up 정상회의> 위원회 위원장, 쉘 마그네 분데빅 전총리, 매리 앨린 멕니쉬 미국친구봉사단 대표, 올레 단볼트 뮤스 노벨위원회 위원장, 가이어 룬데스타트 교수, 요한 갈퉁 교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저에게 이렇게 영광된 자리에서 말씀할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해 마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대화의 힘 - 공동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상호주의 대화”의 정치에 대해서 몇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37년전인 1971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부터 일관되게 공산주의는 반대하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북한과 대화하고 협력할 것을 주장해 왔습니다. 당시는 냉전이 소용돌이치던 시기였습니다. 남한에서는 북한을 증오하고 북한을 말살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저의 주장은 군사정권과 냉전주의적 세력에 의해서 비난도 받고 용공세력으로 공격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저는 투옥, 망명, 납치, 사형언도 등 갖은 박해를 20년 이상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굴치 않고 북한과의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의 3원칙 아래, 1단계 남북연합, 2단계 남북연방, 3단계 완전통일을 골격으로 하는 ‘햇볕정책’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1998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취임사부터 이러한 저의 정책을 설명하면서 남북간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문제를 논의하자고 김정일 위원장에게 제안했습니다.
북한은 저의 ‘햇볕정책’에 대해서 처음에는 이솝 이야기에서 햇볕이 행인의 망토를 벗기듯이 북한 체제를 벗겨버리려는 계획이라고 오해하고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햇볕정책’은 남북간에 대화를 통해서 평화와 교류 협력을 실현하고 공동이익을 실현하자는 것이다”라고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마침내 북한은 저의 주장을 이해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저를 북한에 초청했습니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북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장시간의 정상회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맨 먼저 김정일 위원장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있고 책임있는 자리에 있을 때 민족을 위해서 평화와 협력과 통일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이요, 우리의 의무다. 그러나 이렇게 원칙론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조건도 얘기해야 한다. 북한은 남한을 공산화하겠다는 야심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어떠한 합의도 볼 수 없고, 다시 한 번 민족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한편 우리는 북한을 흡수통일한다는 생각을 절대로 갖지 않겠다. 우리는 서독이 아니다. 북한을 흡수통일할 만한 그런 경제적 능력이 없다. 그리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독일의 통일 결과를 보면 이질적인 사회에서 장기간 살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통일하다 보니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내가 1993년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독일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그는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어도 마음의 장벽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산통일도 반대하고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도 반대해야 한다. 오직 대화를 통해서 평화 속에 단계적인 방법으로 공동승리의 통일을 해야 한다.”
저의 이러한 발언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것 같이 보였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한이 북한을 흡수통일할 의사가 없고, 통일을 서두르지 않고 단계적으로 해 나가겠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을 열어 놓고 대화에 응해왔습니다. 정상회담을 통해서 우리는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 단계적 통일, 남북간의 경제,사회,문화,체육 등 모든 분야의 교류 협력,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 등에 합의했습니다. 이러한 합의는 50년간의 냉전체제를 화해 협력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남북 모든 국민은 물론 전세계가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엔을 비롯하여 많은 국제평화기구와 세계 모든 나라들이 환영하고 지지해 주었습니다.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의 경색 때문에 많은 장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정상회담 이전 50년 동안 불과 200명밖에 만나지 못하고 서로 생사조차 몰랐던 이산가족이 이제 1만 8천명이 상봉했습니다. 남쪽에서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사람이 180만명에 이릅니다. 한국이 북한 땅에 조성한 개성공단에서는 지금 3만 3천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2002년 6월 북한이 서해에서 남한의 해군을 선제공격하여 피해를 입혀 전투가 확대될 위기에 있을 때, 북한은 즉시 6.15 정상회담 이후 개설된 핫라인을 통해서 자기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유감의 뜻을 표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투가 확대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저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핫라인은 계속운영 되었습니다.
남한에서 북한을 찾아간 민간인이 매년 10만명이 넘습니다. 그들은 북한에 가서 교육사업, 의료사업, 구호사업, 문화 체육사업, 그리고 자동차 제조 공장, 대마 방직공장 등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 재임 중 이러한 민간 차원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을 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북한의 굶주리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서 매년 식량 40~50만톤과 비료 30만톤을 지원해서 북한을 기아 위기에서 구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비료 30만톤을 주면 식량이 30만톤 이상 증산됩니다. 또한 남쪽에서 의료장비와 의약품도 보내서 북한 주민들이 큰 혜택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북한의 민심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과거에 남한을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북한을 타도하려는 원수’로만 보았던 북한 사람들이 이제 남한의 대통령이 북한을 찾아가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잇따라 식량과 비료를 지원한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남한에서 보낸 식량과 비료의 포대에는 남한제라는 표시가 있기 때문에 북한주민들은 이것이 남쪽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한이 잘 사는구나. 우리를 미워한다더니 귀중한 식량과 비료를 보낸 것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도 남한처럼 잘 살고 싶다. 통일이 빨리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 내에서 문화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지금 남한의 대중가요를 부르고, 남한의 TV 드라마나 영화를 비공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저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5년 동안 임기의 반은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을 상대했고, 반은 부시 대통령을 상대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저의 ‘햇볕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요청에 의해 북미간 직접 대화하고, 미사일과 핵 문제 해결에 합의하고, 국교정상화 실현에도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채 마무리되기 전에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났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등장한 이후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악을 행한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줄 수 없다’는 정책을 강행했습니다. 그 결과 북미관계가 크게 경색되고 남북간의 교류 협력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부시 대통령을 설득했고 한반도에서 냉전이나 무력대결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대화의 길로 나가도록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저는 부시 대통령에게 “대화는 친구하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 하면서도 대화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에도 북한과 1953년 휴전협정을 체결하면서 주고받는 협상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부시 대통령도 일시적으로는 북미대화에 동의했으나, 2002년 10월 미국에 의해 북한의 농축 우라늄 의혹이 제기되어 북미간 협상의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끈질기고 간곡한 북한과 미국에 대한 설득의 노력은 사태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막는데 기여했다고 믿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8년 임기 중 6년 동안 북한에 강경정책을 밀어붙였으나 그 결과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요원을 추방하고, 모라토리엄 하에 있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마침내 2006년 10월 9일 핵탄두 실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제 부시 대통령은 자기의 정책적 과오를 깨닫고 북한과 대화하고 주고받는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결국 클린턴 대통령과 제가 추진하던 공동이익의 화해협력 정책, 즉 ‘햇볕정책’을 실질적으로 수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한반도에서 6자회담에 의해서 핵문제가 해결되고, 이미 합의된 대로 6자회담에서 동북아 안보체제를 구성하게 되면,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 그리고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지금 6자회담은 또다시 경색상태에 있지만 북핵문제는 결국 6자회담과 북미 직접대화, 주고받는 협상의 테두리에서 해결될 것입니다. 대화를 통한 해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새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이 북한과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남북간의 대화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결정적 영향력을 갖는 6자회담과 북미관계가 진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남북의 어느 쪽도 서로 대화를 단절하고 냉전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때 이룩한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수용하면 남북간의 대화는 이루어질 것으로 봅니다. 대화를 통해서만 안전과 상호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북한은 지하자원과 관광자원이 풍부합니다. 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여 파리, 런던까지 가는 육로를 열려면 북한철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철의 실크로드’가 형성되면 물류와 경제협력이 크게 일어나 남북이 다같이 큰 이익을 볼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라시아 각국도 큰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남북한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서 잃은 것만 있었고, 얻은 것은 없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의 냉전에도 증오와 적대, 막대한 군비확장 등의 소모적인 역사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대화를 통해서 남북관계를 항구적인 평화 협력 체제로 전환할 시기가 왔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북미관계의 개선과 6자회담의 성공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이 하루 빨리 열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한반도에서 대화정치의 미래는 현재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 전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남북의 7천만 민족이 이를 바라고 있고 그 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신사 숙여 여러분!
미국과 서방세계는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대결해서 50년간 냉전 시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냉전을 통해서는 평화도 얻지 못했고, 소련의 인권이나 민주주의에의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결국 ‘대화의 장’으로 문제를 이끌어갔습니다.
미소간의 데탕트는 이러한 대화정치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데탕트는 구주안보협력조약, 즉 헬싱키 조약을 가져왔습니다. 헬싱키 조약을 통해 동서 양측의 상호안전보장, 경제,문화 교류와 인적왕래 등이 실천되었습니다. 그 결과 소련과 동구라파 사람들은 서방을 방문하게 되고, 서방에서 소련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게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낙원을 가져오지 못했고 서방세계가 ‘악마의 세계’가 아니라, ‘선망의 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소련과 동구라파 내의 민심에 큰 동요와 비판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을 가져왔고, 결국은 소련과 동구라파의 민주화로 이어졌습니다. 독일의 통일도 주변국들과 소련의 협력의 힘이 컸다고 하지만, 결국은 수십 년에 걸친 ‘동방정책’에 의한 교류협력 등 대화와 협력의 결과가 동독을 변화시켜 자발적으로 서독의 품에 들어오게 만든 것입니다. 대화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나라에서도 냉전이나 열전으로는 갈등이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역시 대화와 상호주의적 협력으로 오늘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갈등은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서, 공동 이익의 기반 위에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공동 이익은 대화 성공의 불가결한 조건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준 지상과제이기도 합니다. 지금 중동이나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지역 등지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무력 대결도 무력만 가지고는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공동 이익을 전제로 한 평화적 대화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세계화 시대인 21세기의 인류에게 더한층의 많은 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공동승리의 대화입니다. ‘햇볕정책’입니다.
저의 말씀을 마치면서 한반도에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6자회담과 남북간의 갈등이 대화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Keynote Speech to Nobel Peace Prize Laureate Summit(Stavanger, Norway Sept. 11, 2008)
Respected Chair of Nobel Peace Prize Laureate Follow-up Committee Gunnar Berge, Former Prime Minister of Norway Magne Bondevik, Representative Mary McNish of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Chair of the Norwegian Nobel Committee Ole Mjos, Professor Johan Galtung, Distinguished Guests!
I would like to express my sincere appreciation to you for giving me the opportunity to speak on this honorable occasion.
Today I would like to offer some reflections on politics based on “The Power of Dialogue - Reciprocal Dialogue with the Objective of a Win-Win Outcome.”
I have been consistent in calling for dialogue, with this determination stretching back 37 years to 1971, to the time when I ran for the Korean Presidency. I have consistently claimed that Korea should engage in dialogue and cooperation with North Korea, adhering to my position of being opposed to communism but for peace and unification.
At that time, the world was swept up in the Cold War. The voices of hatred and calls for the destruction of North Korea dominated in South Korea.
Accordingly my assertion prompted criticism from the military regime and its followers of the Cold War, and I was branded as a communist sympathizer.
As a result, I endured more than 20 years of persecution, including imprisonment, exile, kidnapping, and even a death sentence. Not daunted, however, I have advocated the “Sunshine Policy” based on the three principles of peaceful coexistence, peaceful exchanges, and peaceful unification, which should be pursued consecutively in three stages of a confederation, federation, and complete unification. When I came into office as President in 1998, right from the start, even in my Inauguration Speech I set out this policy and proposed to Chairman Kim Jong-il of North Korea the holding of a South-North Summit Meeting to discuss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our own people's issues.
North Korea at first resisted my proposal as they thought I was trying to bring down the regime, in the same way as the sunlight in the Aesop fable succeeds in taking off the cloak of a passerby. But I persisted in my efforts to persuade the regime, saying that “the ‘Sunshine Policy’ aims at realizing peace and cooperation based on exchanges as well as bringing about a win-win outcome by means of dialogue between the South and the North.” Finally Pyongyang came to understand my intention and Chairman Kim Jong-il invited me to North Korea, where I had the historic summit with Chairman Kim over three days from June 13th to 15th 2000. First of all, I told Chairman Kim, “People don’t live forever. Even though they are in high positions, they cannot remain in such positions forever either. Now as we are in life and hold highly responsible positions, we are obliged to open the path to peace, cooperation, and unification for all Korean people. That is how you and I can live forever in history. That is the duty you and I have to share. But we have to move beyond simply talking about this in principle. We have to actually engage in concrete discussions on this. North Korea should completely abandon any idea of communizing the South. Otherwise we cannot reach any agreement and may draw the Korean people into another war. For its part, South Korea would never consider the idea of unification through absorption of North Korea. Unlike West Germany, South Korea is not economically able to absorb North Korea. Even if it were, unification by absorption is not an option considering the lessons from the German experience that the country has suffered many negative effects following the overnight unification of two totally different societies. Indeed, when I met with former German President Richard von Weizsacker in 1993, he lamented that even though the Berlin Wall had collapsed, the walls in people’s minds had not come down. Therefore, neither unification by communization nor unification by absorption can be an option for us. We have to achieve win-win peaceful unification in a phased manner only through dialogue.”
My words did seem to move Chairman Kim to an extent. Chairman Kim Jong-il was assured that the South did not intend to absorb the North, and rather than pursuing hasty unification, it would take a phased approach towards unification. And finally he had a change of heart, opening his mind to sincere dialogue with me.
In the summit, Chairman Kim and I agreed on the principle that the Korean people would themselves resolve the issues facing them and also agreed on: phased unification, and exchanges and cooperation in all areas including the economic, social, cultural, and sports fields. And Chairman Kim also agreed to pay a visit to Seoul. These agreements served as the starting point, a first step in turning the 50-year-old Cold War structure into a system of reconciliation and cooperation. Not only the people of the two Koreas, but indeed people all around the world were surprised and moved. Many international organizations devoted to the pursuit of peace, including the United Nations, and all countries around the world joined in welcoming and supporting this historic development.
Inter-Korean relations following the June 15th Summit, despite many difficulties resulting from the strained relationship between Pyongyang and Washington, were developed even further. To give one clear example to illustrate this, prior to the Inter-Korean Summit, of those people separated from their families for over five decades, not even knowing if their loved ones were alive, only 200 people were united. But 18,000 people have so far met with their separated families. 1.8 million South Koreans have traveled to Geumgang Mountain, the famous tourist attraction in the North. 33,000 North Koreans are working hard in the Gaesung Industrial Complex which South Korea has established in the North.
In June 2002 when North Korean soldiers carried out a preemptive strike in the West Sea against the South Korean marine corps, inflicting damage on Korean soldiers, and the battle was about to reach critical point, the North immediately acknowledged through the hotline installed after the June 15th summit that the strike was their fault, and expressed their regret over the situation. This communication prevented the battle from spreading. The hotline remained in operation until the end of my term.
More than 100,000 South Korean civilians visit North Korea every year. They are engaged in educational projects, healthcare projects, humanitarian aid, cultural and sports projects, and economic activities, for example, in car manufacturing plants. While in office, I actively supported such activities at the private level. Furthermore, at the government level, over 400,000 tons of food and 300,000 tons of fertilizers were shipped to the North every year, which were of great value in helping the North out of the food crisis. 300,000 tons of fertilizers increase food production by over 300,000 tons. Not only that, medical supplies as well from the South greatly benefited North Koreans.
In the midst of this, great changes were evident in the minds of North Koreans. Having thought that South Korea was a puppet of American imperialists and an enemy trying to overthrow the North, North Koreans were moved at the news that a South Korean President came to them, extending a hand asking for reconciliation, and brought them a series of supplies of food and fertilizer. Reading the signs printed on the packages of food and fertilizer, North Koreans knew that the aid was from South Korea. They began to think, “South Korea seems to be rich. I heard that they hated us, but it can’t be true, or why would they give these to us? I wish that we could live well like them. I hope that unification will come quickly.” This shift in thinking has led to a change in the culture in the North. And people in the North do now unofficially sing Korean pop songs and enjoy Korean TV dramas and films.
Distinguished Guests!
While I was in office for five years from 1998 to 2003, I worked with President Clinton for the first half, and with President Bush for the latter half. President Clinton openly supported my Sunshine Policy. And on my request, he sat at the table for direct dialogue with North Korea, reached an agreement to resolve the missile and nuclear problems and to normalize diplomatic ties with Pyongyang.
Unfortunately his term came to an end before he was able to fully conclude these matters.
Following the inauguration of President Bush, North Korea was designated as part of an axis of evil. He announced in his policy that the U.S could not engage in dialogue with one doing evil, and no rewards would be given to such forces. As a result there was a serious souring in the DPRK-US relations, which led to a great deal of difficulties in inter-Korean exchanges and cooperation. Nevertheless I met with President Bush and strongly argued that the U.S should rule out the possibility of embarking on a Cold War or igniting armed confrontations and come out on the path of dialogue. I also told Bush, “Dialogue is not meant to take place only between friends. President Reagan had dialogue with the Soviet Union, a country he called an “evil empire.” President Eisenhower had reciprocal negotiations with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to reach an armistice in 1953.” After that, President Bush agreed to hold the North-U.S dialogue temporarily, but with the suspicion of uranium enrichment in North Korea raised by the U.S in October 2002, North-U.S negotiations were no longer a possibility. However, I believe that my endeavors for sincere and persistent persuasion for Pyongyang and Washington played a part in preventing the situation from being drawn to a miserable end.
For six out of eight years of his presidency, Bush played with hard-line policies in dealing with Pyongyang but to no avail. Pyongyang withdrew from the Nuclear Proliferation Treaty, expelled IAEA inspectors, fired long-range missiles while it was under a moratorium, and finally tested nuclear weapons on October 9th, 2006.
Fortunately President Bush has awakened to his policy mistakes and is sitting at dialogue table with Pyongyang to engage in reciprocal negotiations. He finally came to accept the policy of reconciliation and cooperation for a win-win outcome, which is the sunshine policy that Clinton and I had pursued.
If the nuclear issue of the Korean Peninsula is resolved through the Six-Party Talks, and a Northeast Asian security structure takes shape as agreed in the Six-Party Talks, this is expected to contribute to peace in Northeast Asia, and by extension, to world peace. Although the Six-Party Talks are in deadlock again now, the North Korean nuclear issue will be resolved within the framework of the Six-Party talks, direct dialogue and reciprocal negotiations between Pyongyang and Washington. I firmly believe so: indeed, there is no other option than dialogue to resolve the nuclear issue.
Currently, the new Lee Myung-bak government is at odds with Pyongyang. Inter-Korean dialogue is on hold. But the situation will not last long, because the two most decisive elements of the Six-Party Talks and North-U.S relations will make progress. Neither Seoul nor Pyongyang wants to stop dialogue and return to a Cold War era. They are still pursuing the path of dialogue. I believe that if President Lee Myung-bak acknowledges the June 15th South-North Joint Declaration and October 4th Declaration issued respectively by the Kim Dae-jung government and the succeeding Roh Moo-hyun government, the two Koreas can resume dialogue. It is only through dialogue that security and a win-win outcome for the parties concerned can be achieved.
North Korea has abundant underground resources and tourism resources. If Korea is to open an inland road through Eurasia to reach Paris and London, it has to pass through North Korean railroads. We all know that if this so-called “Iron Silk Road” is realized, it will bring enormous benefits for both Koreas as well as countries in Eurasia. During the Korean War, which broke out in 1950, the two Koreas suffered enormous losses and gained nothing.
During the five decades of the Cold War, an exhausting history was repeated, characterized by hatred and animosity, and the expansion of armaments.
Now is the time to transform the inter-Korean relationship into a structure for permanent peace and cooperation through dialogue. Improvements in North-U.S relations and the success of the Six-Party Talks will be the key in this. In light of this, I believe that another South and North Summit has to be held soon.
I think that, despite the current deadlock, the prospect of the situation on the Korean peninsular is not pessimistic if it goes through dialogue. Because it is the shared aspiration of the 70 million South and North Koreans and indeed there is no other option.
Distinguished Guests!
Following the end of World War II, the U.S and the West spent five decades of the Cold War in confrontation with the Soviet Union. But the Cold War did not bring peace nor positive changes in the field of human rights and democracy. Ultimately, they took these matters to forums for dialogue. Detente between the U.S and the Soviet Union marked the beginning of the politics of dialogue. Detente led to the Final Act of th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known as the Helsinki Accords. The Helsinki Accords facilitated mutual security assurances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and economic, cultural, and human exchanges.
As a result, the peoples of the Soviet Union and East Europe visited the West and met peoples from the West who were visiting the Soviet Union.
They came to the realization that communism failed to build a paradise, and the Western world was not a land of evil, but a land of envy.
Following that, the Soviet Union and East Europe witnessed great changes in public sentiment and criticism emerged from within.
These changes led to Gorbachev’s perestroika and glasnost, resulting in the democratization of the Soviet Union and East Europe. German unification was said to be made possible through the cooperation of neighboring countries and the Soviet Union is said to have been a major element in German unification. And there were other elements of importance, which were dialogue, exchanges and cooperation enabled by the decades-long Ostpolitik that actually transformed East Germany and pulled it into the fold of West Germany. The power of dialogue was great indeed. The same logic applies in the cases of China and Vietnam. Neither the Cold War nor the Hot War could resolve conflicts in these two respective countries.
It was dialogue and reciprocal cooperation that brought changes to these two and shaped China and Vietnam of today.
Distinguished Guests!
We have learned from history that all conflicts should be resolved by means of peaceful dialogue and for mutual benefit. Mutual benefit is a precondition for the success of dialogue. This is the pressing task that we have to achieve given by history. In the world today we see armed conflicts in the Middle East, Africa, Latin America, and Asia, but it is not by force that these can be resolved. It is only through peaceful dialogue aiming at a win-win outcome that we can find solutions to such situations. The people of the 21st century, living in the age of globalization, find that they are called upon to engage in more dialogue and at a level unprecedented in history. Dialogue for a shared victory! This is the very essence of the sunshine policy!
In closing, I would like to ask for your great interest in and support for peaceful dialogue so that we can, through dialogue, succeed in finding our way out of the stalemated Six-Party Talks and the troubled South and North relationship.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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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김대중재단는 개인정보를 수집·이용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로 이를 이용하거나 이용자의 동의 없이 제3자에게 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 김대중재단는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하여 이용할 수 있습니다.다만, 주민등록번호는 후원회원 결제 목적으로만 사용하고 별도로 수집하지 않으며, 국세기본법, 전자금융거래법 등 관련법령에 따라 주민등록번호 및 은행계좌번호의 수집 보관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이용자에게 고지하여 해당 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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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후원회원
- 성명, 주민등록번호(또는 외국인등록번호), 아이디, 비밀번호, 생년월일, 연계정보 : 김대중재단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이용에 따르는 본인확인, 연령제한 서비스 제공 등
- 이메일주소, 전화번호, 이동전화번호, 주소 : 소통의 원활한 진행, 본인의사의 확인, 불만처리, 새로운 서비스 정보와 고지사항의 안내 등 커뮤니케이션
- 신용카드정보, 은행계좌정보, 이동전화번호정보 : 후원금 결제서비스의 제공 등
3) 기타
- 서비스 이용과정이나 사업처리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정보들이 자동으로 생성되어 수집될 수 있습니다.
- IP Address, 방문일시, 서비스 이용 기록 : 부정 이용 방지, 비인가 사용 방지 등
라. 김대중재단는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수집할 경우 반드시 이용자의 동의를 얻어 수집하며, 이용자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인종, 출신지, 본적지, 사상, 정치적 성향, 범죄기록, 건강상태 등의 정보는 이용자의 동의 또는 법령의 규정에 의한 경우 이외에는 수집하지 않습니다.
마. 김대중재단는 회원 가입을 만 14세 이상인 경우에 가능하도록 하며 개인정보의 수집·이용에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필요한 만 14세 미만 아동의 개인정보는 원칙적으로 수집하지 않습니다. 단,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얻은 경우에는 만 14세 미만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수집·이용할 수 있습니다.
바. 김대중재단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1) 홈페이지, 서면, 팩스, 전화, 고객센터 문의하기, 이벤트 응모
2) 생성정보 수집 툴을 통한 자동 수집
개인정보의 보유기간 및 이용기간
김대중재단는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원칙적으로 고지 및 약정한 기간 동안 보유 및 이용하며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되면 지체 없이 파기합니다. 단, 다음의 정보에 대해서는 아래의 이유로 명시한 기간 동안 보존합니다.
가. 관련법령에 의한 정보보유 사유
상법 등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법령에서 규정한 일정한 기간 동안 이용자 개인정보를 보관합니다. 이 경우 김대중재단는 보관하는 정보를 그 보관의 목적으로만 이용하며 보존기간은 아래와 같습니다.
① 계약 또는 청약철회 등에 관한 기록
보존 이유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 제6조 및 시행령 제6조
보존 기간 : 5년
② 대금결제 및 재화 등의 공급에 관한 기록
보존 이유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 제6조 및 시행령 제6조
보존 기간 : 5년
③ 사용자의 불만 또는 분쟁처리에 관한 기록
보존 이유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 제6조 및 시행령 제6조
보존 기간 : 3년
④ 본인확인에 관한 기록
보존 이유 :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에 관한 법률 제44조의5 및 시행령 제29조
보존 기간 : 6개월
⑤ 접속에 관한 기록
보존 이유 : 통신비밀보호법 제15조의2 및 시행령 제41조
보존기간 : 3개월
⑥ 부정이용기록
보존 이유 : 부정이용의 배제 등 김대중재단 방침에 의한 보존(구매회원 약관 제15조)
보존 기간 : 1년
나. 수집된 개인정보의 보유·이용기간은 서비스이용계약체결(회원가입)시부터 서비스이용계약해지(탈퇴신청, 직권탈퇴 포함)입니다. 또한 동의 해지 시 김대중재단는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상기 명시한 정보보유 사유에 따라 일정 기간 저장하는 자료를 제외하고는 지체 없이 파기하며 개인정보취급이 제3자에게 위탁된 경우에는 수탁자에게도 파기하도록 지시합니다개인정보 처리방침에 대한 내용을 입력하십시오.